후배인 Y양의 소개로 만난 U양은 Y양과 같은 학술알바(명칭은 그냥 지었음)를 하던 사이.
평소 말이 없고 조용한 성격이던 U양은 현장 사람들에게도 말이 없는 조용한 성격 탓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만 지내던 중이었다. 어느날 말 몇마디라도 하는 날이면 '와 U양이 오늘 몇 마디나 했어.' 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 물론 Y양에게서 들은 이야기라서 조금 오바성 짙은 이야기라고 생각되긴 하지만, 어쨌든.
그러던 중 친구에게 온 전화에서 소개팅 이야기가 나왔고, 그 건수를 들은 현장사람들은 다들 말렸다고 한다.(아마 그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오지랖이 넓은 후배인 Y양은 U양에게 '차라리 내가 소개팅을 시켜주마' 라고 말했고, 그 검색대상 중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8월 초 어느날
나는 최근들어 조금 친해진 듯한 Y양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게 되었고(개인적으로 꽤 친하게 된 후배가 잘 없다;;), Y양은 뜬금없이 내게 소개팅 이야기를 꺼냈다. 할 생각 없느냐고.
물론, 나는 당연히 할 생각 따위 없다고 했다. 당시의 나니까.
그냥 꺼내본 이야기일지도 모르지. 나는 다른 생각으로 좀 더 꽉 찬 상태였고 소개팅 같은 걸 할 만한 여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8월 둘째주 어느날
나는 H군과 나름의 생각이라던가 고민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마침 소개팅 이야기도 있었다는 말을 한 것 같다.
H군은 닥치고 하라고 했다. 예를 들자면 조금 이상하지만, '길에 떨어진 복권이 있다면 긁어보는게 낫냐? 아니면 그냥 어차피 꽝일테니 놔두고 가는게 낫냐?' 라는 이야기였다.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H군이 하고싶은 말이 무엇인지는 대충 알 수 있었다.
뭐, H군은 '경험'이라는 대전제로 나를 설득하려 했고, 나도 뭔가 깨닫는 것이 있어서, 또 여러가지 유인으로 인해 해보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던 것 같다. 그래서 Y양에게 그 소개팅 건수 아직도 있냐고 물었고 결국 하기로 했다.
8월 둘째주 주말 전
여러가지 준비들을 했다. 나에겐 아직까지도 낯선 곳인 시내도 돌아다녀 보고, 맛집에 대한 이야기들도 들어보고, 그런 쪽에 대한 기술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많은 조언을 구했다. 예상외로 H군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었다.
8월 둘째주 토요일
약간의 점검들. 그리고 H군에게 옷이라던가 가방 같은 것들을 빌렸다. 시내에도 한번 더 나가보고, 괜찮은 곳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저녁에는 주선자인 Y양과 만나 저녁식사를 같이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도중에 U양의 이름이 U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학교라던가 키 같은 것들, 대략적인 이미지를 잡을 수 있을 정도의 성격이나 버릇 같은 것에 대해서 듣게 되었다. 사실 처음에는 이번 소개팅은 상대가 누구건 결코 아무 상관없이 진지해져 보기로 다짐했었기 때문에 그런 정보가 필요하진 않다고 생각했었지만, 그건 역시 내 입장만 생각한 것이고, 소개팅 당일날 상대를 최대한 배려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런 정보들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 사진까지 보고 싶진 않았지만... 눈 앞에서 흔들면 아무리 굳은 다짐을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Y양은 내가 곤란해 하는 것에 꽤나 즐거워 하는 것 같았다.(물론 그점에서는 H군도 마찬가지였지만) 하지만 당사자가 내가 아니라면 나 역시 그럴 것 같았기에 그 기분은 충분히 이해할 순 있었다.
여튼 그 자리에서 들은 바로는 U양은 상당히 조용한 성격에 순진한 성격, 그리고 이성친구와 한번도 교제해 본적이 없는 타입. 아니, 교제 수준이 아니라 말도 제대로 나누지 않아본 모양이다. 옷차림은 대체로 좀 수수한 차림에 힐 같은건 신어본 적도 없는 모양. 화장품도 소개팅을 한다는 것 때문에 좀 급하게 준비했다고 하고, 취미에 대해서 물어보니 Y양도 전혀 아는 사실이 없다고 했다. 뭐 딱히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나는 조금 나쁜 습관이지만 이야기를 통해 이미지를 만들었고, 그 이미지는 굉장히 성실하고 요령이 없는 타입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한숨이 나왔다. 나 역시 진지하게 그런 쪽으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 만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상대 역시 경험도 없고 요령도 없는 타입이라면 부담백배가 되는게 당연한 느낌. 어떻게 보면 파고들 여지가 전혀 안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어진 정보를 가지고 이리저리 재료를 만들어가며 이야깃거리들과 만들어 볼 상황들,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의 가능성들을 가정해서 나름의 준비를 할 순 있었다. 데이트 코스에서 빠진 부분도 그 때 채워 넣었다.
8월 둘째주 일요일
오후 4시에 시내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내 경우엔 오히려 좀 더 일찍 나와서 만약에 늦게 되는 사태에 대비하려 했고, 그리고 H군과 T군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H군이 머리를 깍으러 간 미용실에서 H군의 솰라솰라로 인해 머리 손질도 받았다. 뭐, 당시엔 고맙다는 생각은 안 들었지만.
그리고 카페에서 기다리는 동안 Y양에게서 문자가 왔다. 도착했다는 소리에 나름대로 좀 더 자세를 단정히 하고 긴장되게 앉아있었다.
U양은 내가 보기에도 꽤 신경써서 온 듯 했다. 처음에는 굉장히 부끄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해서 오히려 내가 적극적으로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적당히 연결점인 Y양 이야기도 꺼내고,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이용해서 조금씩 대화를 유도해보려고 애를 써봤다. 그리고 Y양은 차 한잔 마시고는 사악한 미소와 함께 사라져 버렸고, U양과 둘이서 조금 어색하지만 어떻게든 대화를 나눴다. U양도 소개팅이라는 것을 의식한 것인지 스스로 부끄러워 하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하는 것 같았고, 너무 명백하게 보여서 나도 최대한 편하게 해주려고 노력을 했다. 이런저런 농담이라던가, 재미있는 친구들 이야기라던가, 대화의 흐름에 맞춰서 적당히 즐거울 만한 화제를 찾아서 이야기를 했고, 나름대로 준비가 통했는지 U양도 꽤 즐거워(하는 듯이 보이긴)했다. 그런 피드백이 있었기 때문에 나도 더욱 용기를 얻어서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서로 길치인데다 시내쪽과 친하지 않아서 곤란하다는 점. 내가 알아봐둔 식당으로 찾아가는데도 꽤 애를 먹었다. 이야기 도중...
U양 [사실 제가 꽤 길치라서요. 시내쪽에 잘 나오질 않으니.]
J군 [아 저도 그런데. 그럼 어쩌죠? 이러다 같이 헤매게 되는거 아니에요? 하하.;]
U양 [뭐, 그냥 같이 걸으며 천천히 찾아보죠.]
같은 시덥잖은 이야기를 했었다.
그리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 스파게티를 먹었다. 그 레스토랑에는 주로 뉴에이지 음악으로 깔려 있었고, 처음에는 아무도 없었다. 메뉴판의 뒤에는 그 스파게티보다 3배는 비싼 스테이크도 적혀 있었지만 서로 아무도 뒷페이지까진 펼치지 않았다.(정확히는 펼쳐보려다 급히 앞장으로 돌렸다.) 어쨌거나, 많이 못 먹는다는 U양도 간신히 다 먹긴 했었다.
저녁을 먹으며 한참 이야기를 하다 보니 7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통금시간이 있다던 U양. 하지만 평소 많이 못 먹는다던 U양을 데리고 바로 뭘 먹을 순 없었기에 바로 근처의 오락실로 데려갔다. 아마 거의 한번도 와보지 못한 모양. 같이 농구골대에 공 집어넣기랑, 색깔별로 된 버튼을 누르는 게임을 했었다. 사실 U양은 꽤 둔했을런지도 모르겠다. 게임 시작과 동시에 거의 인설트 코인이 떴으니.;
그리고 노래통에서 노래도 조금 부르다가 시내 뒷골목 으슥한 곳에 위치한 칵테일을 취급하는 술집으로 갔다. 오직 촛불로만 조명을 삼는 곳이라 꽤 어두침침한 매력이 있는 곳이다. 마찬가지로 U양은 처음 온 듯해 보였는데, 분위기는 꽤 맘에 든 모양이었다. 약간 단우유맛이 나는 칵테일을 시켜주고, 난 달고 독한맛이 나는 칵테일을 먹었다. 본래 9시까지라는 통금시간인데 엄한 아버지가 늦게 퇴근하는 날은 버스만 끊기지 않을 정도면 상관 없다는 이야기에 거기서 9시 반까지 이야기하며 놀았다. 이야기 도중, 빠른 생일 이야기가 나왔었다.
J군 [그런 빠른 생일 가진 애들이 항상 얍삽하잖아? 필요할 때는 한살 더 먹었다면서 항상 나이 이야기가 나오면 젊다고 강조하고.]
U양 [하하하. 맞아요. 제 친구 중에도 그런 애가 있거든요.]
...(중략)
J군 [그러고 보니 혹시, U양도 빠른 생일이거나 그런건 아니겠지?]
U양 [아, 저는 아니에요.]
J군 [그럼 언젠데?]
U양 [음, 저는 음력으로 쳐요. 7월 6일요.]
...그리고 나는 기회를 봐서 자연스럽게 폰을 보는 척 하며 0706을 적어 넣었다.
그 외에는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아무튼 스스로 보기에는 굉장히 좋은 분위기였고, 칵테일값는 U양이 계산하겠다고 우겨서 그렇게 했다. 아무튼 U양을 보낸 나는...
...어쩌다 보니 친구들에게 다시 낚여서 학교 근처에서 만나게 되었다.
S군 [그래, 좋드나?]
H군 [설레였나?]
J군 [그냥 저냥.]
S군 [임마 좋으면 좋다고 하면 되지. 내랑 똑같은 소리 하고 있네.]
J군 [아, 실제로 하고 보니 니랑 똑같은 소리를 할 수 밖에 없네? 전엔 미안했다.]
S군 [원래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니깐. 그래. 근데 설레였나?]
J군 [잘 모르겠다. 일단 확신할 순 없다.]
H군 [에~ 또 그렇게 널 속이려 들지 마라. 설레였제? 옷이랑 가방이랑 내 협찬까지 받아갔으면 잘 했어야지.]
B군 [냅둬라. J군이 그렇다고 말하면 맞는거지. 너거가 어떻게 아노.]
H군 [알 필요는 없지. 그냥 놀리는게 재밌으면 됐지.]
S군 [근데 원래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니깐. ...근데 J군아. 설레였나?]
J군 [아, 그러니까... 입 좀 닥치라고.]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친구들에게 좋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난 확신할 순 없었다. 당연히 소개팅이라는 자리에서 처음 만났는데 좋고 말고 알 수는 없다. 게다가 그런 쪽의 경험이 없다면 이게 좋은 감정인지 나쁜 감정인지 조차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약간 혼동하고 있었다. U양이 좋은, 혹은 나쁜 사람인가와 U양을 만나는 내 감정이 좋은, 혹은 나쁜 감정인가를 혼합해서 헷갈려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일단 긴장은 했었지만 기분은 좋았던 것 같았고, 그게 좋은 감정이었을 것이라고 단정지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0706이라는 숫자를 보았다. 달력표를 봤다. 8월 셋째주 토요일이었다.
8월 셋째주 월요일
U양과 간단한 전화 통화와 함께 다음 약속, 즉 애프터를 잡았다. 평일에는 항상 학술알바를 하러 내려가니(숙소제공), 평일에는 볼수가 없는 것이다. 셋째주 수요일은 광복절이었으므로 그날을 약속일로 잡았다. 간단하게 영화나 보러 가자고 제의했다. 영화는 화려한 휴가.
8월 셋째주 화요일
사실은 옷을 살까 했었기에 학교에서 V군과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고, 시내로 나갈까 하다가 대화끝에 결국 옷을 살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결국 시내에 나가지 않기로 하고 PC방이나 가서 인터넷으로 표나 예매하고 게임이나 하자고 했지만.
...영화를 인터넷으로 예매하려면 카드가 필요했다. 그런 건 키우지 않는 나는 시내까지 직접 나가서 예매를 했고, 나간 김에 다음날의 데이트 코스를 몇가지 짜두고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인 '길을 외웠다'.
8월 셋째주 수요일
오후 일찍 약속을 잡은 나는 평소처럼 늦을까봐 30분 일찍 도착했다. 극장 옆의 오락실에서 시간을 죽이던 나는 U양의 조금 늦을 거 같다는 문자에 염려하지 말고 천천히 오라고 했다. 오히려 늦으면 영화를 포기하고(표는 아깝겠지만) 카페나 가서 이야기나 나눌까 싶기도 했다. U양은 정확히 영화가 시작하는 시간에 왔다. 어쩐지 조금 급하게 뛴 것 같았다. 나는 괜찮다고 하면서 천천히 데려가서 극장안에 들어갔다. 해당층으로 올라가서 U양에게 음료수나 과자를 권했지만 자신은 영화 보는 중에는 먹지 않는다고 했다. 그점은 나도 마찬가지라서 아무것도 들고 가지 않고 영화를 봤다.
영화는 나름대로 재밌었다. 끝이 나고 U양을 보니 눈물이 글썽대고 있었다. 나도 약간 슬프긴 했지만 그 영화 속에 있는 진실이라던가 그 외면의 것들을 생각하면 마냥 슬퍼지지는 않았다. 그걸 적당히 잊게 해줄 정도로 배우들의 연기가 좋았던 것이겠지. U양은 자신이 눈물이 꽤 많은 편이라고 해명했다.
저녁은 카레로 했다. 인도식 식당이 있는데, 거기로 데려가서 둘 다 카레로 시켰다. 그 영화 이야기를 하다가 영화 초반의 이야기가 나와서(우린 약 10분 늦게 들어갔으므로) 다시 자기가 늦은 것에 대해서 조금 미안해했다.
J군 [아, 그건 신경쓰지 마. 그럴 수도 있는데 뭘. 나도 자주 늦는 편이야.]
U양 [예? 별로 안 그래 보이는데요. 아무튼 늦은건 죄송해요.]
J군 [하하, 괜찮다니까 그러네.;; 오히려 뛰어왔다니 내가 좀 미안하지. 그리고 그런거 있잖아?]
U양 [에? 뭐요. 그런게 뭐에요?]
J군 [여자들은 예쁘게 꾸미고 나오기 위해서 늦는다는거. 아, 그냥 그렇게 들었거든.]
U양 [아... 예. 그렇죠. 그래요. 네. 하하.]
어색하게 웃긴 했지만 대충 그렇게 마무리 됐다. 그리고 카레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 카레에 포함된 성분인 강황이 몸에 그렇게 좋다더라, 그게 생로병사의 비밀이라는 TV프로에도 나왔다 라는 식의 이야기, 그 외에 잡다한 잡담을 하는 사이 음식이 나왔다. 카레는 내가 먹어도 약간 매웠고, 사실 내가 약간 맵다고 느낄 정도면 다른 사람들은 굉장히 맵다고 느끼는 편이다. U양도 꽤나 매웠는지 물과 함께 먹더니 결국 다 못 먹었다. ...음식은 좀 선택미스인가? 내가 데려간 음식점인데 결국 내가 영화를 보여줬다는 핑계로 카레값도 U양이 계산했다. 음, 이건 좀 아니다 싶었지만 사람마다 가치관은 틀린 법이니.
그 뒤에 근처 공원에 갔다. 대충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다가, 하늘도 점점 어두워지고 분위기가 차분해질 무렵.
J군 [소개팅 뒤에 이렇게 만나는걸 애프터라고 하더라구. 들어봤어?]
U양 [아, 그래요? 그러고 보니 들어본 적 있는거 같기도...]
J군 [응. 그래서 말인데, 난 너랑 있으니까 꽤 즐거워서. 그래서 다시 만나고 싶거든. 다음에 다시 봐도 될까?]
U양 [예?]
고민하는 U양.
U양 [다음에 언제요?]
J군 [응? 어... 그러니까 다음에. 언제든.]
U양 [...혹시, 지금 말해야 해요?]
J군 [아, 아니. 지금 말할 필요는 없지.]
여담이지만 U양은 이때 두번 만나본 소개팅 상대가 사귀자고 말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나는 U양에게 꽤나 편하게 대해줬기 때문에 약간의 긴장감을 심어주려고 꺼낸 이야기였고, 지금 만나는 전제가 편하게 아는 오빠동생 사이가 아니라고 은근슬쩍 꺼내본 이야기.
J군 [아, 혹시 교제하자고 들은거면 그런게 아니고, 좀 더 만나보는게 어떻냐는 이야기야.]
U양 [아,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해요.]
...라면서 다시 은근슬쩍 분위기를 편하게 돌릴 수 밖에 없긴 했지만. 그 뒤엔 주로 농담을 섞은 이야기들을 했다.
그날은 8시까지가 통금이라 7시 조금 넘어서 버스에 태워 보냈다.
나중에 만난 H군.
H군 [그래서?]
J군 [그래서 그랬지.]
H군 [이거 완전 ㅈ병신이네. 방법이 잘못됐잖아.]
J군 [뭐가? 나는 내 나름대로 긴장감을 주려고 했을 뿐인데.]
H군 [그러니까 걔 생일이 토요일이라며. 바로 약속을 잡았어야 할거 아냐 ㅈ병신아? 다음에 언제 라고 물으면 그거잖아.]
J군 [그런게 아니라고. 난 내가 뭘 잘못했는지 전혀 모르겠다. 게다가 생일은 개인에게 중요한 날이잖아. 다른 스케줄이 있을지도 모르고. 그걸 쉽게 그자리에서 물어보면 안되지.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을건데.]
H군 [어이구. 나라면 안 그랬을 거다. 쓸데없는 배려는 안해도 된다.]
J군 [그래. 너라면 안 그랬겠지. 나라면 그랬을 거다.]
별로 영양가 없는 이야기들이 계속되었다. 뭐, 이런건 방법론의 문제라기 보다는 역시 가치관의 문제니까.
8월 셋째주 목요일
문자나 전화 같은걸 하다가 다음 약속 이야기가 나왔다. 난 토요일을 은근슬쩍 꺼내봤지만 그날은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일요일을 물어보니 그날은 잘 모르겠다며 될거 같으면 자신이 연락하겠다고 했다. 물론 난 생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8월 셋째주 금요일
우연히 저녁에 K군과 L양을 만나게 되었다. L양은 수능이 며칠 안 남은 동생이 이제 고향으로 내려가기 때문에 조촐하게 저녁을 먹기로 한 모양이다. 나도 끼어서 K군과 L양과 L양 동생과(이전에 만난적이 있어서 꽤 스스럼 없이 지내게 됐다) 함께 학교 연못 앞에서 통닭과 맥주를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그러던 중 U양의 이야기도 나오고, 새롭게 뭔가 하려는 나에게 그 커플은 자신들이 사귀게 되었을 때가 생각나는 듯 그때의 일을 이것저것 회상하며 놀았다. 그러고 보면 K군과 L양의 이야기도 참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으로 가득차 있다. 물론 당시 서로의 입장이 어떠했든 간에 듣는 나는 재밌었다.
그리고 L양은 여자의 입장에서 이것저것 조언을 해주기 시작했는데, 생일 선물이라던가 그런 쪽 이야기.
J군 [나는 애초에는 손수건이라던가 그런걸 생각했는데.]
L양 [...나쁘진 않지만, 나라면 별로 기쁘진 않을거다. 그걸 요새 누가 쓰냐?]
J군 [역시 별로인가. 그럼 어떤거?]
물론 그전에 H군과도 그런 이야기를 했었고, 남자인 H군은 향수를 추천했었다. 그 외 자기 누나라던가 여선배라던가 에게도 뻔질나게 물어본 모양이지만. 취미생활이 없는 U양에게는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L양 [간단한 악세사리도 괜찮을지도. 걔 귀걸이는 하나?]
J군 [그러고 보니...]
이전에 소개팅 자리에서 평소 U양이 귀를 완전히 가린 헤어스타일이어서 보이지 않았던 귀가 머리를 쓸어올리는 타이밍에 우연히 보게 된 적이 있었다. 나는 귀걸이가 꽤 예쁘다는 식으로 칭찬을 했었다. 그건 두번째에서도 마찬가지.
J군 [U양의 얼마 안되는 취미생활 중 귀를 뚫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L양 [그럼 귀걸이를 해줘라. 물론 별로 안 비싼걸로. 향수 같은 건 솔직히 좋은거 아니면 좀 별로고. 좋은 거 해줘도 받는 입장에선 부담이다.]
J군 [오... 역시. 이런건 여자들에게 물어봐야해. 주변에 애들이랑 차원이 틀리네.]
K군 [임마 나도 얼마전에 너에게 좋은 조언들을 해줬었잖아! 별로 안 틀리구만!]
J군 [응? 뭐라고 했었나?]
K군 [이자식!]
뒷목을 잡고 쓰러지려는 K군을 무시하고 선물은 귀걸이로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야기는 거기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우리 동기들의 이야기도 나오고,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오던 중.
L양 [여자애들한테는 너처럼 말하면 안된다.]
L양은 약간은 맥주가 오른 모양.
J군 [나처럼 말하는건 뭔데?]
L양 [니는 남이 말하는걸 잘 안듣고 솔직하지 못해. 그리고 뭔가 좀 기계같애.]
J군 [흐음. 기계라니?]
L양 [너무 이성적으로만 생각하고 말하고, 필요한 것만 말하고 그러면 안된다는 거다.]
J군 [아, 그건 알고 있는데.]
L양 [그리고 알고 있다고 말하지 마!]
버럭- 나는 뜨끔했다.
L양 [알고 있으면 그냥 마음 속으로 알면 되는거다. 그걸 말로 할 필요는 없다고. 니한테 ㅇ양이랑 ㅎ양이 니가 모르는 주제 외에는 말하는거 들어본 적 있나?]
J군 [...아니.]
L양 [왜냐면 니가 안다고 말하면 니가 거기에 대해서 흥미가 없는 줄 알거든. 다 알고 있는 거잖아? 그래서 아는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할 생각이 안 들어. 그리고 니가 안다고 거기에 대해서 너무 설명하려고 해도 안돼. 듣는 입장에서 얼마나 지루한 줄 알아?]
우와. 원래 L양이 좀 거침없긴 하지만 제대로 들었다. 이건 위크포인트 작렬.
아무튼 침 튀기며 열을 내는 L양의 말들은 구구절절 다 맞는 이야기들. 앞으로를 위해서는 좀 명심하고 있어야겠다고 느꼈다.
8월 셋째주 토요일
오늘 뭔가 약속을 잡았으면 했지만 U양은 돌아오는 대로 친구들과 만나러 갈 예정.
나는 H군과 T군과 시내에서 이럭저럭 놀다가 귀걸이 가게로 찾아갔다. L양이 괜찮은 곳들을 소개시켜줘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물론, 나중에 남자 셋이서 악세사리 가게에 갔다는 사실은 놀림감이 되긴 했지만.
나는 달이 뜨기를 기다려 U양에게 전화를 걸었다. 음력 생일이라 달이 뜬 시점에서 축하를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날은 칠석 직전이라 모양이 잡힌 초승달이 확연하게 보였다. 의외로 U양은 대화 중 지나가는 말로 생일 이야기가 나와서 모를줄 알았다고 했다. 말을 안하면 원래 모르는건 맞다고 하지만, 어쩌면 눈치가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저녁에는 H군과 T군과 S군과 나중에 합류한 Y양과 술자리를 가졌다.
이것저것 이야기 할 거리가 꽤 많았던 것 같다. Y양은 일단 U양과 같이 생활하니 물어볼 것도 꽤 많았었다. Y양은 선물로 꽃도 괜찮다는 식으로 이야기 했었고, 당연히 나는 실용성과 전혀 거리가 먼, 언젠가는 시들 수 밖에 없는 꽃은 별로라는 식으로 이야기했지만 Y양은 꽃은 실용 목적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도 그러고 보면 그럴 듯 하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U양은 원래 생일은 친구들과 보내기로 했었다고 했다. 물론 H군은 끝까지 내 잘못이라고 우겼지만 역시 이놈은 오바성이 너무 강하다.
J군 [이제까지 생각했던 방법론이라는거. 의외로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어.]
H군 [무슨 소리야? 원래 그게 제일 중요한거야. 몰라서 안하면 상대도 모르는거다.]
J군 [하지만, 그냥 있는 그대로 상대를 생각하고 배려해주게 되면, 방법론 자체를 몰라도 자연스럽게 방법들이 나오게 되더라구.]
H군 [아니, 그거랑 이거랑은 틀리다. 그럼 제대로 된 방법이 아니게 되잖아.]
J군 [제대로 된건지 아닌지 니가 어떻게 아냐? 니도 잘 된 경험 같은거 없으면서.]
H군 [니보단 많거든? ㅈ병신아?]
역시 H군과의 의견은 절대 통일이 안되는거 같다.
대충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끝나고, 잡담들을 즐기다가 왔다. 그날은 T군과 S군은 생각보다 조용히 있었다.
8월 셋째주 일요일
T군의 생각은 달랐다. 남자라면 당연히 그 여자의 집까지 찾아가서라도 생일날 선물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어제는 친구들과 논다면 그 친구들과 같이 있는 U양이 있는 곳에 가서 잠시라도 불러내서 줘야 한다고 극구 주장했지만 나는 물론 아무도 찬성하지 않았다. 그 타협점이 바로 이것.
일요일이 지나면 다시 일주일동안 볼 기회가 없는 나로서는 마지막엔 그 의견에 솔깃해졌다. 그래서 저녁 무렵이 다 되어서 나는 U양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쩐지 토요일 밤을 새고 꽤 늦잠잔 모양.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다가 집 근처까지 가도 괜찮을까, 하며 물었다.
의외로 U양은 우리 학교까지 찾아오겠다는 것. 나는 용기를 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급하게 H군에게 근처 좋은 카페를 이야기해 달라고 하고, 가져온 선물을 잘 챙기고, 꽃도 하나 21송이를 준비했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린 U양에게 꽃을 주고 근처 카페로 데려갔다. U양은 급하게 오느라 화장도 못하고 왔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입술에 바르던 립스틱 색깔이 없다. 화장에 익숙하지 않은 U양이다 보니 더 힘들었을 것이다.
이야기를 하다가, 시간이 다 되어가기에 선물을 줄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오늘도 머리는 귀를 완벽하게 가린 상태. 나는 그냥 감으로 말을 꺼냈다.
J군 [어라? 오늘은 귀걸이 안하고 왔네?]
물론 했는지 안했는지 나는 모르지. 한번도 머리를 쓸어 올린 적이 없으니. 그런데 의외로
U양 [아, 네. 역시 급하게 오느라... 잘 때 빼 놓고 잤었거든요.]
J군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그 때 귀걸이를 3개 했었던가?]
U양 [네. 그랬죠. 아직 오른쪽은 다 안 뚫었거든요. 아래쪽에는 다음에 친구랑 같이 가서 뚫기로 했어요. 친구는 귀걸이 한 번도 안 해본 애거든요.]
J군 [그렇구나. 참, 귀걸이가 딱 붙는 거였잖아? 원래 좀 늘어지는 귀걸이 같은건 안하는거야?]
U양 [아, 아직은 안했어요. 아래쪽에 뚫어야 할 수 있거든요. 이번에 뚫으면 그런 것도 한번 해보고 싶어요.]
...타이밍을 찾았다. 그리고 나는 말 없이 귀걸이 상자를 꺼냈고, U양은 조금 놀란 표정.
U양 [아, 이게 뭐에요?]
J군 [응. 생일 선물.]
U양 [어, 뭔지 봐도 되요?]
J군 [어, 뜯어 봐.]
...낑낑 대는 U양. 포장지가 뜯기 어려웠나 보다. 내가 들어서 포장지를 뜯어주고 상자를 주자, 이번에는 상자를 못 열고 있다. 아래쪽으로 열어서 상자도 열어주니(...), U양은 굉장히 순수하게 기뻐했었다. 사실 말을 그렇게 이끌어냈으니 효과가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선물하는 귀걸이는 조금 늘어지는 긴 귀걸이.
J군 [아 전에 본건 딱 붙는 거여서 이렇게 긴 거는 안하는가 싶어서 좀 걱정했거든. 그래도 이게 예뻐보여서. 마음에는 들어?]
U양 [아 예. 되게 맘에 드는데요.]
J군 [그럼 다행이고.]
뭐 대충 그렇게 해서 마무리 짓고는 이야기를 좀 더 하다가 나와서 학교 앞에서 버스를 태워 보냈다.
약간 정류장에서 가는 버스를 보다가 학교에 놔둔 책을 찾으러 들어가려는 중...
턱-
하고 내 어깨에 얹어지는 묵직한 손.
뒤를 돌아보자 극악한 표정의 K군과 웃겨 죽겠다는 표정의 L양이 서 있었다.
K군 [으하하하하하. 난 다 봤다!]
L양 [나도 다 봤다~]
J군 [뭐고! 왜 너거가 거기서 튀어 나오는데?]
K군 [아니~ 니가 왜 거기 서 있는데?]
L양 [우린 그냥 지나가고 있던 길이었을 뿐이야. 근데 니랑 걔랑 버스정류장에 서 있던데?]
J군 [...그럼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냐.]
K군 [꽤 한참전부터 보고 있었다. 후후후. 자 이걸 봐라!]
K군이 내민 휴대폰에는 S군과 H군과 V군의 번호가 찍혀 있었다. 확인만 누르면 문자가 전송될 예정.
K군 [이녀석들에게 이 사실을 전달하기 원하지 않는다면 김밥을 사라.]
J군 [강탈이냐!]
L양 [미안하지만 나는 사진도 찍었다. 이거이거.]
...마지막의 해프닝은 조금 저레벨이었지만, 아무튼 나름대로 만족스런 결과였다. 결국 김밥은 사주고 말았지만.
8월 넷째주 월 ~ 토요일
평일동안은 U양과 볼 기회가 전혀 없었다. 나는 일단 일상을 즐기며, 자주 연락을 주고 받는 정도로 머물렀다.
화요일 밤, 나는 U양에게 어디 놀러가지 않겠냐고 물었고, U양은 그게 궁금했던 모양이다. 나는 일요일에 날씨나 기타 사정을 고려해서 스케이트장이나 놀이공원(X방X워랜드) 중에서 고를 거라고 이야기했다. 일단 그렇게 일단락 된 듯이 보였다.
사실 어느정도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들어보고, 대체로 소개팅의 만남은 첫번째, 두번째에서 끝나게 되거나, 혹은 2주일이 지나기 전에 고백을 하는 것이 보통이라고들 했다. 2주일. 사실 의미는 알 것 같다. 첫 만남 이후 몇 번의 만남을 더 가져보고,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거나를 스스로 알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다. 목적이 목적이니만큼, 더 이상의 어떤 깊은 속을 알거나 할 의미는 없겠지.
장소에 따른 이벤트 준비도 시작할 생각이었다. 사실 앞서 장소 두 곳을 미리 말한 이유는 U양의 취향을 약간 떠 본 것이었고, 그 결과 놀이동산쪽이 훨씬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백을 할 때 어떤 말로 꺼내야 할까, 같은 고민을 시작했다.
나는 항상 상황이 좋다고 느끼고 있었고, 실제로 연락 중에도 다음에 뭔가 가르쳐 준다거나, 서로 같이 뭔가 한다거나 하는 약속들을 간간히 언질하는 중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J군 [아, 이제 잘 시간인데 뭐 하나 싶어서 전화해 봤어.]
U양 [그래요? 지금 여기 현장 사람들하고 고스톱을 치고 있었어요.]
J군 [그래? 이야 의왼데. 칠 줄 아는거야?]
U양 [그럼요. 근데 사실 점수 계산하고 그런건 전혀 몰라요. 그냥 똑같은 그림을 내면 가져 온다는 것만 배웠어요.]
J군 [헤에?]
U양 [이거 100점 따기 내기인데, 꼴지가 내일 아침에 샌드위치를 만들기로 했거든요. 하하. 근데 제가 지금 꼴지에요. 그래서 사람들 표정이 좀 안좋네요. 제가 요리 굉장히 못하는거 다들 아니까.]
J군 [엇. 위기인건가. 샌드위치라. 요리 같은건 언제든지 배울 수 있으니 잘 못해도 괜찮아.
U양 [그렇죠? 헤헤. 이번에도 기회 삼아 배워보면 괜찮을지도.]
J군 [그래. 아, 그래도 막판 역전이 있으니 포기하면 안돼.]
U양 [네. 일단 열심히 해보고 있어요. 근데 오빠도 고스톱 칠 줄 알아요?]
J군 [나야 뭐. 놀이나 잡기에는 꽤 능한 편이니까. 하하. 고스톱도 칠 줄 알지. 내가 다음에 점수 계산하는법 가르쳐 줄게.]
U양 [아하? 정말요? 네. 가르쳐 줘요.]
J군 [그래. 역전 성공 하길 바랄게. 하하. 그럼 잘 자.]
U양 [네. 오빠도 잘 자요.]
...같은 대화들. 이런 상황이다 보면 상식적으로 어지간하면 좋게 생각하는게 당연하다.
그런데 수요일 밤에 전화했을 무렵, U양은 갑자기 어디 놀러가기 보다는 카페 같은 곳에서 조용히 이야기나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음, 사실 나쁘지 않지. 놀기 좋아하는 애는 아니니까. ...같은 생각들을 하면서도 어딘가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순 없었다.
나는 고백할 분위기를 끌어낼 방법과 대사 등등을 생각하면서, 만약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 경우를 대비해서도 입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대충 3가지 정도로 나누어졌다.
고백을 하고 받아들이는 경우. 그럼 뭐, 여러가지로 좋은 거니까. 일단 정해졌다는 사실은 앞으로 나아가는데에 훨씬 큰 원동력이 될 거다. 그럼 앞만 바라보고 쭉 나아가면 된다.
고백은 했는데 저쪽이 입장이 애매한 경우. 보수적인 편이니 너무 이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아직은 잘 모르겠다고 할 수도 있다. 그 때는 '뭐 한 번만에 성공할 순 없는 거니까. 앞으로도 계속 나는 말할거야. 괜찮지?' 같은 입장을 생각했다.
최악의 상황인 고백을 할 수 없거나, 했는데도 거부의 입장이 뚜렸한 경우. U양은 착한 편이니 똑 부러지게 말하진 않겠지만, 아마 편한 오빠동생으로 지내자거나, 약간 우회적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걸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아마 그런 말이 나오면 편한 오빠동생으로 지내진 않을 거라고 입장을 정리했다. 여러번의 경험이 있으니까.
8월 넷째주 일요일
약속장소에 10분전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미 U양은 15분전에 도착한 상황. 조금 늦었나?
전날 H군과 미리 봐둔 카페로 데려갔다. 당연히 길은 외웠고, 별 어려움없이 도착했다. 이전에는 조용한 카페들만 찾아갔지만 여긴 크고, 조금은 활기찬 카페. 주문받는 식이 아니라 주문한 것을 직접 들고 가져가야 하는 곳이었다.
적당히 단맛의 케익도 있으면 좋겠다 싶어 둘러보니 쇼콜라 종류의 케익이 눈에 띄었다. 예전 파르페 쇼콜라 라는 게임을 해보면서 꽤 맛있을 거라는 편견이 생겨있던 터라(야겜이니 검색은 자제), 그걸 시켜서 가져갔다.
평소처럼의 잡담. 기억에 의존한 이야기의 연결. 상대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상대가 말한 것이나 상황 모두를 기억할 수 있다는 뜻이다. 덕분에 할 이야기는 꽤나 무궁무진했고, 꽤나 재미있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U양은 의외로 만화를 굉장히 많이 보는 편이라고 했고, 나는 그 장르를 간접적으로 물어보다가 꽤 정상적인 로맨스 만화(소녀 만화?)같은 것임을 알았다. 사실 야오이계열이 아닐까 하는 의심은 했었지만(게다가 나름대로 그쪽에 별 거부감은 갖고 있지 않으니까) 그쪽 계열은 잘 모르는 모양. 그러다가 오타쿠라던가, 하는 그런 용어가 나왔고, 그건 자신도 들어봤다고 했다. U양의 동생이 자신이 만화책을 쌓아 두고 보고 있으면 그런 소릴 한다는 이야기. 뭔지 모르고 지나갔는데 찾아보니 의미가 그렇더라~ 면서 약간 화를 냈다거나 하는 이야기. 그리고 엠티를 가서 내가 여장을 하기도 했었다거나 하는 이야기도 했고, U양은 사진 같은거 없냐는 식으로 꽤 호기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 외에도 예전 이야기들의 연장으로 꽤 즐거운 분위기.
그러던 중, U양은 갑작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은 꽤나 말을 멈춘채 분위기를 전환시키고, 뜸을 조금 들인 뒤에지만.
U양 [근데, 오빠는 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 역시 잠시 말을 멈췄다. 어떻게 하나? 사실 조금 계획의 차질이 생김을 뜻하기도 했다. 왜냐면 나는 카페 이후 저녁식사, 그리고 분위기가 잡힌 곳에서의 고백을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야기가 나왔으니 회피할 수도 없었다.
U양 [아, 너무 갑작스럽나요? 하하. 음음.]
J군 [...그거야. 말하자면. 보는 대로인걸. 나는.]
조금 뜸을 들였다.
J군 [응, 나는 네가 마음에 들어.]
U양 [...그래요? 아하.]
이야기의 맥이 끊겼다. 서로가 굉장히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 조금씩 어색해질 무렵.
U양 [저, 저는 처음에 오빠 만나고. 사실 괜찮았어요. 오빠가 되게 신경써 주시고, 편하게 해주시고. 그랬잖아요.]
J군 [그렇게 느꼈다니 다행이네. 사실 나도 잘 모르고 있었으니까.]
U양 [예. 그렇죠. 그런데, 음... 네. 저는 오빠가 굉장히 편하니까. 그... 음, 그런게 안 느껴졌어요.]
J군 [...그래? 그런게 뭔데?]
U양 [어. 음. 그러니까. 일종의 긴장감이라던가, 뭔가 팟 하고 오는 그런거요.]
...팟 하고 오는 거라니? 그런게 어딨어?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차마 말할 순 없었다.
J군 [그렇구나. 나는 사실 아직도 긴장하고 있는데. 아니, 매번 긴장하고 있었고.]
U양 [...그래요? 음.]
또 어색한 침묵. 대충 분위기는 정해지고 있었다. 시선을 돌리다 창밖을 보니 그렇게 덥고 맑았던 날씨였던 것에서, 갑자기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어이없게도.
U양 [음, 아무튼 그래요. 저. 오빠랑 저, 오빠 동생사이로는 지낼 수 없나요? 오빠 입장을 생각하면 이런 말 하긴 미안하고. 오빠가 그렇게 지내기 싫다고 해도 이해는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나는 내 입장도 정리할 수 있었다. 전날 상정했던 세 개의 상황중 마지막이었다. 나는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J군 [나는, 음. 오빠동생 사이라는게 어떤건지 잘 알아. 네가 어떻게 생각하고 꺼낸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결말이라던가, 그런건 꽤 겪어보기도 했고. 게다가 우리는 연락하지 않으면 볼 수 없잖아? 같은 학교도 아니고, 가까이 지내던 사이도 아니야. 게다가, 나는 이렇게 생기는 애매한 인연은, 오래가지 않는다고 생각해. 그렇다면 굳이 만들 인연도 아니고.]
U양 [...그래요? 음, 잘 모르겠지만, 알 것도 같아요.]
그리고 다시 침묵. 그렇지만 난 일찍 일어나고 싶진 않았다.
J군 [마지막인데, 좀 더 이야기 하고 싶어. 괜찮아?]
U양 [네. 저도 그래요.]
서로 일어날 생각은 없는 듯 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궁금했던 점들. 소개팅에서의 모습이라던가, 좋았던, 혹은 나빴던 점들. 그리고 이런저런 가치관의 이야기들을 했다. U양도 좀 더 솔직해져서 우리는 서로의 밑바닥까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U양 [주변 사람들에게 제가 좀, 감정이 없다거나 기계같다는 말을 듣곤 했어요.]
J군 [그래? 그건 좀 의외인데.]
U양 [그렇죠? 사실 이런건 잘 드러나진 않으니까요. 이제껏 누굴 좋아했다거나, 한 적도 없는 것 같아요.]
사실 지금 누구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는 질문도 했었지만, 그건 아니라고 했다.
U양 [아니에요. 좋아하는 사람이 전혀 없었는데 지금 있을리가요.]
아마도 U양의 좋아하는 감정의 기준치는 상당히 높은 모양. 그런 서로의 어릴 적 이야기라던가,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를 밑바닥까지 하며 조금 느낀점이 있었다.
...어떤 면에서 U양은 나와의 닮은 꼴. 지금까지는 잡기에 능하지만 꽤 불성실한 나와, 잡다한 요령을 모르지만 한 길만 파는 성실함이 돋보이는 U양이 상당히 대비되어 보였고, 적어도 보기엔 그랬으므로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U양은 마치 4년전의 나와 같았다. 아니, 적어도 그렇다고 느꼈다.
아마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경험적인 면. 그녀가 내게 가지는 감정과 내가 그녀에게 가진 감정은 별반 다를게 없었고, 다만 그 확신할 수 없는 감정을 나는 좋아하는 감정이라고 믿었고, 그녀는 아니라고 믿었을 뿐이었다. 근본적인 가치관의 차이. 서로의 방향이 엇나가고 있었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점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조금 아쉬움을 느꼈지만,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었다. 시간은 꽤 빨리 지나갔다. 뭐, 하지만 굳이 저녁을 같이 먹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서로 우산은 없었지만 비가 약해진 사이 지하철까진 같이 가기로 했다. 마지막이니까.
지하철 역에 데려다주고, 나는 작별을 고했다.
J군 [그럼 잘 가.]
U양 [네. 오빠도 잘 가요.]
늘 붙이던 다음에 또 보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카드를 대고 개찰구를 들어서는 사이, 나는 몸을 돌리고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의외로, 후회나 미련은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물론 이것 또한 확신할 수 없는 감정이긴 했지만, 나는 경험칙상 그렇다고 믿었다. 분명 예전의 R양 때와는 다른 그런 감정.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걸까?
주선자였던 Y양과 2주일간 가장 많이 같이 다녔던 H군과 저녁 대신 조촐하게 한잔 하기로 약속을 잡고는 학교로 갔다. 물론 그들은 내가 꽤 슬픈 상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어떠냐 싶었다. 어쨌든 나는 더 많은 대화를 하고 싶었다.
버스를 탈 무렵에는 비는 꽤 깔끔하게 그쳐있었다.
2주일도 그렇게 깔끔하게 마무리 되었다.



